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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들은 다양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2011-08-22 09:28

조선족의 제2고장 청도겨레들은 다양한 빛을 발산하고있었다
겨레들은 다양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청도 조감도.

산동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해변도시 청도, 맥주도시로도 불리우는 청도는 조선족들에게 아주 익숙한 도시이면서 또한 아주 매력적인 도시이고 인기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청도에는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 등지에서 진출한 상당한 수의 조선족들이 거주하고있다. 현재 청도는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있는 연변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두번째로 가는 조선족집거지로 불리운다.

여러번 발목 잡힌 8월의 청도행

어찌보면 이번 청도 취재길은 시작부터 힘들게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분하지 않다. 7월말 취재를 결심하고 티켓을 구매하려고 보니 4일까지 티켓이 매진된것, 5일자 연석표를 끊고 렬차에 올랐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런지 도착하는 날은 공교롭게도 토요일이였다. 하루라도 취재날자를 미루지 말자는 생각에 휴식일을 생각하지 않는 결과였다. 다행히 청도에 도착한 날 한분을 취재할수 있어 헛된 하루를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이 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때마침 관광성수기와 겹치다나니 청도에 도착해 조선족이 집중된 성양구에 숙박을 잡으려 했는데 성급호텔은 어떤지 몰라도 비즈니스려관이라든지 조건이 좀 괜찮은 려관 예닐곱곳을 돌았는데 방이 없다는것, 한참 거리를 돌다가 겨우 우리 글로 된 려관을 발견하고 투숙할수 있었다.

이뿐이 아니였다. 7일 저녁부터 8일까지 태풍 “무이파” 특보가 울리면서 청도시는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이때문에 많은 선박, 항공기들이 결항되였는데 그로 인해 계획했던 취재도 무산되고말았다. 취재대상이 사업차로 북경에 갔다가 항공기결항으로 계획했던 날 돌아오지 못했기때문이였다.

시작만 힘든게 아니였다. 렬차표 구하기가 힘들다기에 청도에 도착한 이튿날 미리 티켓을 사려고 하니 3~4일후의 연길행 티켓은 매진되였고 14일까지는 있다 해도 좌석티켓 혹은 좌석조차 없는 티켓뿐이란다. 그래서 별의별 가능한 조치를 다 생각해보았다. 북경을 에돌아가는 방법, 심양이나 장춘까지 갔다가 연길로 가는 방법, 아예 항공티켓을 끊을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심지어는 차라리 표를 구할수 있을 때까지 꾹 머무를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던중 연태에 있는 대학동창과 통화하는 과정에 대학동창이 연태—대련—연길 경로를 권장하기에 결국 청도에서 뻐스로 연태에 도착하고 다시 연태에서 배편을 리용해 대련으로 이동하고 대련에서 100원 더 지불하면서 암표상으로부터 티켓을 구매하는 등 도로, 항로, 철도 세가지 교통수단을 종합적으로 리용해서야, 그것도 연태, 대련 동창생들의 덕분에 연길에 도착할수 있었다.

연변을 제외한 중국내 최대 조선족집거지

알다싶이 청도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해있는 고장이다. 특히 성양구는 청도시내 조선족 제1집거지로서 거리를 걷다보면 우리 글로 된 간판들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고 드문드문 들려오는 우리 말소리도 들을수 있었다.

청도에 조선족(상주인구와 림시인구)이 얼마 거주해있는지 구체적인 통계는 없는것으로 안다. 청도의 확실하고 권위있는 통계수치를 알려는 마음에 숙박을 정한 비즈니스호텔에서 가까운 성양구공안분국을 찾았다. 성양공안분국 호적담당부문을 찾아 료해하면 청도시 조선족인구실태를 쉽게 파악할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오산이였다. 공안분국 선전과의 녀성관계자가 이곳저곳 련계하던중 결국 상급부문의 허가, 청도시선전부문의 허가를 거쳐야 한다며 취재를 접수하기 불편하다는 리유로 거절되고 말았다. 조선족의 실태는 현지인들을 통해 료해할수밖에 없었다.

청도의 조선족인구수를 두고 일각에서는 30만명, 20만명, 10만명 등 부동하게 추정하고있다. 월드옥타 청도지회 박광수회장을 취재할 때 박광수회장은 현재 청도의 조선족은 근 4만명의 상주인구를 포함하여 18만명을 웃돌것이라고 했다. 어찌하든가를 막론하고 청도시는 연변에 이어 두번째로 조선족이 집중된 곳임은 틀림없었다.

청도의 조선족인구 역시 기타 조선족이 집중된 곳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청도시지(青岛市志)에 따르면 건국초기 청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은 부대에서 제대하여 청도에 온 리석호, 박정태 등 15명으로 이들이 청도의 상주인구로 확인되고있다. 그후 각 대학,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청도에 배치받은 학생이 개혁개방전까지 27명이며 이들은 과학기술, 교육, 위생, 대외무역 등 부문에서 사업한것으로 기재되고있다. 개혁개방후 인재류동이 심화되고 장기 분거해있던 상황이 개변되면서 선후로 43명 조선족이 청도로 전근, 1982년에는 83명의 상주조선족이 있었고 1990년까지 청도에는 487명의 조선족(청도출생 포함) 상주인구가 있은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2000년 청도의 조선족 상주인구는 1만 4491명으로 10년간 근 30배 장성하였다.

청도 조선족사회 다양한 분야로 확장

청도 조선족의 가장 큰 변화는 림시거주인구의 급증이다. 개혁개방전 청도의 조선족이 주로 대학교 졸업후 교육, 과학기술, 위생 등 부문에 배치받은 고급인재, 전업군인, 항일간부와 그 가족들로 이루어졌다면 개혁개방후에는 김치장사, 작은 음식점으로 시작한 사람들로부터 사업에 성공한 기업인들, 외국인기업의 직원들 등도 가담하면서 조선족사회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였다.

개혁개방후 초기 조선족의 청도진출 그리고 조선족의 인구급증에 막대한 역할을 일으킨 여러 요소가운데서 음식업체의 역할을 간과할수 없다. 청도시 특히 조선족들이 집중된 성양구, 리창구 등에는 조선족음식업체들이 상당수 개업해있는것으로 알려졌다. 성양구 거리를 지나노라면 우리 글로 된 음식업체간판들을 쉽게 찾아볼수 있었으며 우리 글로 된 포장마차도 볼수 있었다.

투숙한 호텔에서 50여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골할머니국밥집, 점심식사차 들렸다가 주인과 잠간 이야기를 나눠봤다. 흑룡강성 가목사시에서 왔다는 김씨성의 녀사장은 청도에 온지 2년밖에 안되여 청도의 실태를 잘 모르지만 음식업체가 상당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100여평방메터 되는 자그마한 가게였는데 그동안 영업은 괜찮게 이어가고있다고 했다. 고객중에는 조선족, 한국인은 물론 현지 한족들도 있는것으로 알려졌으며 랭면, 국밥 등 조선족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자그마한 가게는 물론 심지어 세개의 음식점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음식업체는 청도 조선족사회의 판도가운데의 한부분이며 제조업 등으로 성공한 기업인들도 적지 않았다. 180명 회원수를 갖고있는 월드옥타 청도지회 박광수회장에 따르면 현재 청도지회의 회원기업을 보면 제조업을 위주로 경공업, 가공업이 많다고 한다.

기업뿐만아니다. 조선족들은 교육분야에서도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현지인사의 소개에 따르면 청도의 중국해양대학, 청도대학, 청도농업대학, 청도리공대학 등에 조선족인사가 수십명 있는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청도농업대학 송학웅교수는 청도농업대학에만 25명 정도의 조선족교수가 있다고 소개하였다. 대학뿐만아니라 법률, 스포츠, 정부기관, 병원, 문화예술분야 등에도 일정한 수의 조선족들이 활약하고있는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족인구증가와 더불어 조선족학교, 조선족단체 등 협회도 잇달아 설립되면서 청도시의 조선족들을 하나로 뭉치고 민족의 화합을 이루어나가는데 기여하고있었다. 당면 청도의 여러 분야 협회들로는 가장 일찍 설립된 청도조선족기업협회를 비롯하여 청도조선족녀성협회, 청도조선족로인협회, 청도조선족골프협회, 청도조선족축구협회,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 등이 있는가 하면 월드옥타 청도지회도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대형경기대회, 조선족민속축제 등 다양한 행사들을 성공리에, 성황리에 펼치거나 이어가면서 연해도시 청도에서 조선족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가로수가 우거진 록색이 짙은 거리, 거리를 걷노라면 찌르륵 찌르륵 합창으로 들려오는 매미울음소리는 비록 소란스러울 정도였지만 가관을 이루었고 또 하나의 새로운 진풍경이였다. 그러한 모습은 연태에서도 이어졌다.

지인들과 동창생들의 커다란 도움덕분에 취재는 마쳤지만 이번 청도행은 계획날자보다 길어진 어렵게 시작되여 어렵게 끝난 기나긴 걸음이였다. 비록 심신적으로는 고달팠지만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거리로 남을것임은 분명했다(전윤길 기자).

청도거리의 일각.
청도거리의 일각.
청도거리의 일각.